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밋밋해진 부부관계에 활력 불어넣는 5분의 기적

나 도철 2013. 3. 18. 06:44


 
   '결혼 생활은 침대 시트와 같다.' 며칠 전 신문을 읽다 눈에 꽂힌 제목이다.
제목에 끌려 끝까지 읽었다. 한국에 여성 팬이 많은 프랑스 작가 알랭 드 보통을 인터뷰
한 기사다. "결혼 생활은 아무리 애를 써도 네 귀퉁이가 반듯하게 펴지지 않는 침대
시트와 같다. 한쪽을 펴면 반대쪽이 흐트러진다." 드 보통이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그러니 결혼 생활에서 완벽을 추구하지 말라는 것이다.
 
 독신주의자가 아닌 한 누구나 완벽한 결혼을 꿈꾼다.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서로 아끼고 사랑하겠다는 열렬한 다짐으로 시작한다. 하지만 정열의 시효(時效)는
2년이다. 인간의 뇌 구조가 그렇게 생겼다. 미국의 리처드 루커스 교수팀(미시간주립대)
이 15년에 걸쳐 2만4000명의 독일인을 조사한 연구에서도 그런 걸로 나타났다.
결혼으로 고양된 행복감은 시간과 함께 풍선에서 바람 빠지듯 줄어들어 2년이 지나면
원점으로 돌아간다. 그렇기 때문에 초기의 정열을 애정, 돌봄, 온정, 동반자 의식으로
승화시켜야 사랑은 지속성을 가질 수 있다고 루커스 교수는 말한다.
하지만 그게 쉬운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툭툭 내뱉는 것이 보통 부부다. 아무리 화가 나도 절대
해서는 안 될 말까지 하기도 한다. 칭찬하고 격려하기보다는 무시하고 험담을 한다.
잔소리는 지겹고, 불만은 쌓인다. 무관심이 대화의 단절로 이어지기도 한다. 가장 가까
워야 할 부부가 '웬수'가 될 때 사람들은 이혼을 생각한다. 그렇다고 침대나 소파 바꾸
듯이 이혼을 할 순 없는 노릇이다. 그럼에도 이혼을 감행하는 용감한 커플들이 갈수록
늘고 있다.
 
 2011년 한국에서는 32만9000쌍이 결혼을 했고, 11만4300쌍이 이혼을 했다.
세 쌍이 결혼을 하면 다른 쪽에선 한 쌍이 이혼하는 셈이다. 인구 1000명당 이혼 건수
를 나타내는 조이혼율로 따져 한국은 2.3으로, 세계 최고 수준이다.
특히 55세(남성 기준) 이상의 황혼이혼은 매년 가파른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소니야 류보머스키 교수(미 캘리포니아대·심리학)는 최근 출간한 『행복의 신화』
란 책에서 '5분의 기적'을 강조한다. 아침에 일어나 오늘은 어떤 말과 행동으로 배우자
나 파트너를 5분 동안 기분 좋게 해줄 수 있을까 생각하고, 그걸 실천에 옮긴다면 결혼
으로 고조된 행복감을 계속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비결은 거창한 데 있는 게
아니라 따뜻한 말 한마디, 그윽한 미소, 부드러운 눈길, 귀 기울여 경청하기, 등 두드려
주기, 어깨 감싸주기, 손잡기 등 사소한 말과 행동에 있다는 것이다.
 
 행복한 결혼 생활을 유지하는 부부는 부정적인 언행을 한 번 할 때마다 평균 다섯 번
의 긍정적 언행으로 부정적인 감정을 무마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류보머스키 교수는
말한다. 행복의 비밀은 멀리 있지 않다.
 
분수대 / 배명복 기자
 
아주머니가 전단을 내민다 받아야 하나 외면해야 하나


 

    점심시간이다. 열린 축사 문으로 우르르 양떼 쏟아지듯 사람들이 순식간에 큰길을

가득 메운다. 부근에 오피스빌딩이 많은 탓이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식당으로 가는 길

에도 두세 명씩 꼭 마주치는 분들이 있다. 전단 돌리는 아주머니다. 5000원짜리 한식

뷔페, 새로 생긴 치킨·피자집, 헬스·요가 겸용에 운동복·수건까지 준다는 '

월 3만원 서울 최저가' 피트니스클럽…. 내미는 전단을 받을 때도 있지만 약속시간이

촉박할 때는 무시하고 지나간다. 여기에도 머피의 법칙이 적용되는 걸까. 남들은 잘도

지나치던데, 내 눈망울만 유독 순진해 보이는 건지 몇 걸음 앞에서부터 알아보고 다가

오는 것만 같다.

 

 회사 선배는 딸이 대학생이던 시절 전단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아빠, 누가 길에서

전단 내밀면 꼭 받아주세요!"라고 호소한 이후 되도록 받는다고 한다. 한 국회의원

부인은 가던 걸음 되돌려서라도 전단을 챙긴다고 했다. 선거운동 기간에 남편 이름이

새겨진 명함형 전단을 돌리다 보면 별별 일을 다 겪는단다. 받자마자 땅에 버리고 발로

밟는 사람도 있다. 왈칵 치솟는 눈물을 참고 얼른 주워 흙을 털어낸다. 그러니 아주머니

들에게 동병상련을 느낄 만도 하다.

 

 통계청에 따르면 음식점의 창업 후 5년 생존율은 17.9%다. 5명 중 4명이 다섯 해를

넘기지 못한다. 전단 하나하나에 정치생명에서 베이비부머 자영업자의 밥줄, 알바

아주머니의 일당이 걸려 있다. 무게가 가볍지 않다. 전단 크기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보통 장당 30원 안팎이 떨어진다고 한다. 1000장 돌리면 3만원. 보통 5~6시간 걸린

다니 요즘처럼 추운 겨울에 쉽지 않은 일이다.

 

 옥외광고물에도 나름 변천사가 있다. 나는 어른남자들에게 고민이 다섯 가지나 있다

는 사실을 이미 초등학교 때 깨쳤다. 전봇대마다 붙어있던 '남성 5대 고민 한번에 해결'

광고물 덕분이다. 문제는 부착형이든 현수막이든 아파트 투입물이든 허가받지 않은

광고는 다 불법이라는 점이다. 게다가 대도시 유흥가는 낯뜨거운 불법광고물 공해가

상당히 심각하다. 많은 지자체가 수거·제거하느라 애를 먹는다. 65세 이상 노인들이

불법 벽보·전단을 가져오면 보상금을 주는 곳도 많다. 학생들이 모아오면 봉사점수를

인정해주기도 한다. 그러나 전화방·폰팅 같은 유해업소 광고 전단은 거꾸로 호기심을

자아내 청소년에게 비교육적이라는 우려도 크다. 그래서 남양주시 같은 곳은 학생자원

봉사활동 인정 제도를 일찌감치(2009년) 폐지했다.

 

 오후 1시 전후. 다시 축사 문을 향해 밀려드는 인파 속에서 전단 아주머니들의 눈이

반짝거린다. 두터운 외투에 목도리를 칭칭 감았는데도 얼굴이 빨갛게 언 아주머니가

다가와 전단을 내민다. 받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분수대 / 노재현 기자

 
단골집이 없는 이유
 
   술을 좋아하는 이들에겐 대개 단골집이 있기 마련이다. 언제든지 가면 반갑게 맞아
주는 주인이 있는 곳, 그리고 덤으로 다른 손님들은 누릴 수 없는 어떤 특별함을 기대할
수 있는 곳 예컨대 그런 곳이 단골집이겠다.
 
   하지만 내겐 단골집이 없다. 성인이 되고부터 줄곧 술을 마셔왔음에도 지금껏 단
번도 단골집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곳을 두지 않았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곰곰 생각
해봐도 딱히 이것 때문이다 싶은 이유를 발견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내가 나를 완전하게
아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라면 내가 나를 전혀 모르는 것은 무책임한 것이다.
 
   나름 짐작하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내가 단골집을 만들지 않는 것은 확실히 내 기질
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나는 무연함과 익명성을 무척이나 즐기는 사람인 것이다.
단골을 자처하고 정해둔 집엘 가면, 주인이 아는 척을 할 것이고 그러면 말을 주고받게
되고, 행동에도 제약을 느낄 게 아닌가. 나는 술을 마실 때 마음이 편한 곳이 가장 좋다.
 
   내가 원하는 것은 내게 따뜻한 말을 건네는 것보다는 그냥 나를 내버려두는 것이다.
그것이 친절이든 시비든 술 마실 때는 그 어떤 간섭도 받고 싶지 않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술 마시는 것은 내가 누리는 가장 사치스러우면서도 일반적인 취미이며
스트레스 관리법이기 때문이다.
공연한 인연을 만들어 이 자유를 빼앗기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길위의 이야기 / 김도언 소설가

 

누가 단골집을 빼앗아 가나

 

   어색한 술자리였다. 말이 떠오르지 않아 더 불편했다. 상대방의 말에 귀기울여 주는

것만으로도 상대방은 치유가 된다는 상담심리학 원론에 기대어 술잔을 비울 따름

이었다. 4년 가까이 자주 들르던 학교 앞 치킨집이 문을 닫는 날이었다. 건너편

삼겹살집 청년이 커다란 비닐봉투에 탁상용 휴지통과 재떨이를 담고 있었다.

쓸쓸한 초저녁이었다.

 

   며칠 사이 주인 부부는 마음을 정리한 듯했다. “당분간 푹 쉬어볼라고요.”

주인 아주머니가 힘없이 웃으며 말했다. 아저씨는 가게 물건을 정리하느라 자주 자리

를 떴다. 6년 동안 닭을 튀기고 생맥주 잔을 채우며 다섯 식구가 먹고살았다. 단골도

많이 생겼다. 나도 그 중 하나였다. 나는 치킨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주인 부부의

인상이 참 좋았다. 두 분 다 눈매가 선했고 말과 행동에 모가 나지 않았다.

‘법 없이도 살 사람들’이었다.

 

   주인이라고 쓰고 보니 짠하다. 부부는 치킨집 ‘주인’은 맞지만, 불행하게도 건물

주인이 아니었다. 지난주 초, 건물주로부터 가게를 비우라는 통보를 받고 나서 권리금을

날리고 말았다. 건물주가 리모델링을 한 다음, 업종을 바꾸겠다는 것이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직후, 치킨집 아주머니가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가 없었다. 임차인들 사이에 주고받는 권리금은 법 밖에 있었다. 건물주와 권리금은

상관이 없었다. 

 

   마지막 단골손님은 셋이었다. 영문학 선생과 글쓰기 선생, 그리고 나. 술값을 치르려

했지만, 부부는 극구 사양했다. 치킨집 주인, 아니 단골집 주인으로서 마지막 권리를

당당하게 행사했다. 치킨집이 문을 닫던 날, 그때서야 주인 부부의 성함을 알았다.

민망했다. 아저씨는 이씨였고 아주머니는 정씨였다. 부부는 두 달 동안 동해안을 여행

하겠다고 했다. 6년 만의 외출일 것이었다. 실로 오랜만에 닭튀김 냄새, 술 냄새가 나지

않는 곳에서 ‘온전한 저녁’과 마주할 것이었다.

 

   자서전의 목차를 구성하는 방법은 다양할 것이다. 시간 순으로 배열할 수도 있고,

삶의 전환점을 중심으로 엮을 수도 있다. 그런데 단골집만으로도 생의 굽이를 정돈할

수 있다. 단골집은 성년식을 거친 이후, 사회적으로 자립 능력을 갖춘 뒤에라야 생겨

난다. 단골집이 얼마나 되느냐는 질문은 평생 친구가 몇이냐는 질문과 다르지 않다.

친구가 없는 삶이 삭막한 것처럼, 단골집이 없는 삶도 황폐해질 수밖에 없다. 단골집은

노동과 휴식, 일터와 집 사이에 있는 ‘경계의 장소’다. 긴장을 이완할 수 있는 안전한

장소다. 단골집은 오래된 사회안전망이자, 소셜네트워크다. 단골집은 좋은 관계가

만들어지는 좋은 장소다.

 

   그 많던 단골집은 다 어디로 갔을까. 20년 가까이 드나들었던 광화문의 허름한 카페

‘다다’는 7년 전 재개발로 인해 철거되고 말았다. 피맛골의 생선구이집과 낙지집도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다. 학교 앞도 마찬가지였다. 10년 넘게 자리를 지키는 상점이

거의 없다. 인사동이나 홍대앞이 그런 것처럼 날마다 내부수리 중인 가게와 마주친다.

우리 사회에는 오래된 것에 대한 혐오증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오래된 것과 낡은 것,

새로운 것과 경박한 것을 구별하지 않는다.

 

   단골집이 없는 사회는 위험한 사회다. 최근 한 대선 예비후보가 ‘저녁이 있는 삶’

이라는 슬로건을 내놓았다. 대선 전략으로 ‘저녁’이란 무기력한 단어가 등장한 것은

헌정사상 초유의 일일 것이다. 우리의 삶과 사회가 이토록 피곤하고 위태롭게 된 이유

중 하나는, 우리가 저녁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저녁은 단골집의 시간이다.

 

   저녁이라는 경계의 시간, 단골집이라는 경계의 장소가 있어야 일이 일다워지고,

휴식이 휴식다워진다. 그래야 삶이 삶다워진다. 저녁이 있는 삶은 단골집이 있는 삶

이다. 그런데 누가, 무엇이 우리의 단골집을 빼앗아가는 것일까. 이 진부한 질문에 대한

답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다. 그래서 더 씁쓸하다.

 

경향 오피니언 / 녹색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