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들이 남편을 알아?
너무 이르지도, 또 너무 늦지도 않은 밤 열한 시쯤 아파트 입구에 들어설 때면 저만치
앞서 걸어가는 사람들 가운데 우리네 가장들이 있다. 일단 축 처진 어깨에다 잿빛
모직 코트에 무릎 나온 코듀로이 바지에다 두툼한 목둘레에 짧은 귀밑머리에다 그 술,
술 냄새까지.
이상한 것은 터덜터덜 잘도 걸어왔으면서도 현관 앞에 서면 에잇, 뒤돌아버리는 이들이
꽤나 있더라는 얘기다. 술기운에 못 이겨 이리 휘청 저리 휘청 흔들리는 대로 한 잔을
재현하면서도 바싹 휴대폰을 귀에 갖다 붙이고 하염없이 불러대던 그 이름 순이야,
엄마야. 왜 이런 순간에 맞닥뜨리게 되는 순이는, 엄마는, 어쩜 그리 순식간에 내 친구
이자 내 엄마로 탈바꿈이 되나.
대머리독수리라고 불리는 19층 아저씨, 계단에 쪼그리고 앉아 한숨과 담배 연기를 차례
로 뿜어대는데 몇 가닥 안 남은 가르마 뒤쪽 머리카락이 자꾸만 가르마 앞쪽으로 넘어와
눈을 가린다. 이 타이밍에 인사성 밝은 내 스타일을 고수해야 하나 우물쭈물하는 사이
공동 현관문이 열린다.
오리털 점퍼에 맨발로 운동화를 구겨 신은 한 남자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전화벨
이 울린다. "어, 샀어. 오이 한 개에 천오백 원이래. 네 개 샀고, 맥주도 세 병 샀어.
기다려 자기." 그의 손에 들린 까만 비닐봉지 밖으로 삐죽이 나온 오이에다 기다려 자기,
라니. 역시 신혼은 남자를 귀찮게 하네그려.
나는 휴대전화로 사네
제자 하나가 첫 월급을 탔다며 휴대폰을 사가지고 왔다. 월급의 3분의 2는 될 값비싼
최신형 기종, 고민 끝에 이걸 덥석 받아 든 데는 나름 이유가 있었다. 스스로가 어떤 사람
이며 어떤 재능을 겸비하고 있는지 모른 채로 그저 제가 판 연못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녀석에게 뜰채를 내민 게 나였으니 말이다.
어쨌거나 그래서 생긴 새 물건은 반갑고 고맙고 기뻤다만 손때 묻은 내 구식 휴대폰이
하루아침에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했으니 이를 어쩌나. 쌍권총도 아니면서 양 호주머니
속에 각기 다른 두 개의 휴대폰을 넣고 다니기를 한 달, 하루는 그 둘에게서 동시에 벨이
울린 적도 있었다.
그때마다 주변의 반응은 이랬다. "야, 네가 무슨 연예인이냐? 어서 하나 정리를 해, 정리."
아, 그래 그 정리란 걸 하기 위해 나도 틈날 때마다 구식 전화기의 전화번호부를 열고
있다고요! 가나다순으로 저장되어 있는 사람들 가운데 제법 친하다고 자신하는 이들 몇을
신식 전화기에 옮기고 나니 글쎄, 이런 가늠과 고심 속에 빠지게도 되는 것이었다.
이 사람은 나랑 친하다고 생각할까? 몇 번 통화한 사이도 아닌데 저장하는 오버는 욕심
아닐까? 이름을 쭉 훑어나가는데 그새 운명을 달리한 사람들도 꽤 읽혔다. 산 사람보다
죽은 사람을 지울 수 없어 에라 모르겠다, 고스란히 옮기고 보니 어머 여기 마라도 자장면
가게 번호도 있네. 하여튼 이 오지랖아!
- 길 위의 이야기. 한국일보 | 김민정 시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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